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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설화1

    익산지역에는 무왕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다.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으로 유명한 미륵사지와 모질메산성으로 불리우는 왕궁평성 , 오금산성 , 오금사지 , 제석사지 , 쌍릉 등 궁성, 절터, 성터, 무덤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적들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익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왕위에 오른 무왕이 익산을 중심으로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왕위에 오른 무왕은 성왕의 관산성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즉위초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것이 무왕 3년(602)의 아막산성의 전투이다. 백제가 평상시에 유지하는 병력은 약 6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2/3에 달하는 4만명의 병력을 상실한 이 전투는 백제 내부에 또한번 커다란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창건설화2

    이러한 아막산성전투의 패배로 사회적 혼란을 무왕은 국왕의 권력강화의 기회로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왕과 관련된 곳인 익산지역에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가 미륵사지의 창건이요, 또 하나는 왕궁평성의 운영이라고 볼 수 있다. 미륵사지는 한국 최초의 석탑인 국보11호인 미륵사지 석탑과 아울러 삼원병립식의 가람배치를 가진 한국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무왕조에는 미륵사지의 창건 연기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현재의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이 말을 듣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루밤 사이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그 역사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미륵사지는 원광대학교의 1974년도 동탑지 발굴과 1980∼1995년까지 문화재 연구소와 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에 의해서 그 전모가 밝혀져 그 규모의 웅장함과 더불어 화려한 치장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창건설화3

    당시의 모습의 일부나마 전하고 있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 양식을 이어받아 그 규모가 거대할 뿐 아니라 한국 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어 그 중요성이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가람배치에 있어서 세 개의 사찰을 한곳에 배치한 삼원병립식의 배치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유례가 없는 형태로 그 특이함에는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륵사지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녹유연목와와 연꽃무늬 수막새 기와, 그리고 석등에 나타나는 조각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대가람인 미륵사지는 어떤 이유에서 이곳 익산에 세워졌을까?

    역사에는 의외성이란 없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는 당위성과 더불어 필요성이 내재해 있다. 미륵사상은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과 같은 것이다.

    즉 불교의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나타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서 널리 유행했는데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부터 널리 신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신앙이란 도솔천(도率天)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불이 입멸하여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츰 늘어 8만세가 될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며, 세차례의 설법으로 272억인을 교화한다는 신앙을 말한다.

    이 신앙은 미륵상생신앙과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미륵상생신앙이란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보살을 만날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쫓아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창건설화4

    그리고, 미륵하생신앙은 먼 장래에 미륵불이 출현할 것이며, 그때 이세사은 즐거운 땅(樂土)으로 변하고 사람의 수명은 8만여세가 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처 제도(制度)하지 못한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로서 모두 구제한다. 따라서 이 신앙은 미래의 일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중 미륵상생신앙은 스스로 노력하고 덕을 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계율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귀족적인 성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익산에서 이러한 미륵상생신앙의 요소는 지명법사가 거주했다는 용화산(龍華山) 사자사 를 통해서 살펴 볼 수가 있다. 사자사는 미륵보살이 도술천에서 수행하였던 사자상좌(獅子上座)에서 따온 사찰 이름으로 미륵상생신앙적인 요소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하생신앙의 구현은 미륵사지의 창건을 통해서 엿 볼수 있다. 앞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관련하여 미륵하생신앙을 살펴보면, 미륵이 하생(下生)할 곳은 땅이 사금(砂金)으로 덮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왕이 어려서 오금산(五金山)에서 마를 캐면서 쌓아두었다는 금은 바로 이것과 관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륵이 성불(成佛)하여 용화수아래에서 3회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데 이를 상징하는 용화산, 연못속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였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곧 미륵의 하생을 의미한다. 아울러 미륵사지가 세 개의 사찰을 지닌 3원병립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은, 곧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3회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경전의 내용을 구상화 해 놓은 것이다. 즉 미륵의 이상세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륵이 하생하여 교화한 세계에는 평화와 화합의 세계가 이룩된다.

    당시 무왕은 지명법사와의 관계로 미뤄 보더라도 미륵신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미륵신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진 무왕은 옛 마한의 중심지인 이곳 익산지역에서 깊이 믿어진 용신앙과 연결하여 미륵하생신앙을 전개시킴으로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8대성으로 알려진 백제의 귀족세력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사비(=현재 부여)에서 이러한 미륵하생신앙을 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륵사의 창건은 무왕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전륜성왕의 위엄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전륜성왕이란, 미륵이 용화수아래 성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미륵을 맞이하러 간다고 한다. 이는 미륵사지 창건연기설화에서 보듯이 백제 무왕이 용화산 아래의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났다는 내용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잇다. 이러한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7가지의 보물이 있는데 이 7가지의 보물로 나라를 다스릴 뿐 무기나 권력으로 억누르지 않아도 모든 적으로부터 저절로 항복을 받는다.

    또 네곳에 저절로 생긴 보물창고가 있는데 전륜성왕은 이 보물들을 모두 보시해서 자신이 가지지 않음으로서 영원히 재물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무왕은 미륵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스스로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사지의 건립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격상시킬 뿐 아니라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왕으로 군림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미륵사지의 창건은 백제 무왕에게 있어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자신을 격상을 통해서 당시 백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줌으로써 백제인들의 정신적인 단결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